- 목차 -
1. 위로는 여호와의 자비다.
2. 위로는 예수 그리스도에게 속해 있다
3. 위로는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사셨다.
하이델베르그 교리문답 제1문~제2문은 "여호와께서 주시는 교회의 유일한 위로"를 말하고 있습니다.
하이델베르그교리문답 제1문. 살아서나 죽어서나 당신의 유일한 위로는 무엇입니까?
(What is your only comfort in life and death)?
답. 살아서나 죽어서나 나는 나의 것이 아니요, 몸도 영혼도 나의 신실한 구주 예수 그리스도의 것입니다. 그리스도께서는 그의 보혈로 나의 모든 죗값을 완전히 치르고 나를 마귀의 모든 권세에서 해방하셨습니다. 또한 하늘에 계신 나의 아버지의 뜻이 아니면, 머리털 하나도 땅에 떨어지지 않도록 나를 보호하시며, 참으로 모든 것이 합력하여 나의 구원을 이루도록 하십니다. 그러하므로 그의 성령으로 그분은 나에게 영생을 확신시켜 주시고, 이제부터는 마음을 다하여 즐거이 그리고 신속히 그를 위해 살도록 하십니다
(That I am not my own, but belong with body and soul, both in life and in death, to my faithful Saviour Jesus Christ. He has fully paid for all my sins with His precious blood, and has set me free from all the power of the devil. He also preserves me in such a way that without the will of my heavenly Father not a hair can fall from my head; indeed, all things must work together for my salvation. Therefore, by His Holy Spirit He also assures me of eternal life and makes me heartily willing and ready from now on to live for Him).
하이델베르그교리문답 제2문: 이러한 위로 가운데 복된 인생으로 살고 죽기 위해서 당신은 무엇을 알아야 합니까?
(What do you need to know in order to live and die in the joy of this comfort)?
답: 다음의 세 부분을 알아야 합니다. 첫째, 나의 죄와 비참함이 얼마나 큰가, 둘째, 나의 모든 죄와 비참함으로부터 어떻게 구원을 받는가, 셋째, 그러한 구원을 주신 여호와께 어떻게 감사를 드려야 하는가를 알아야 합니다
(First, how great my sins and misery are; second, how I am delivered from all my sins and misery; third, how I am to be thankful to God for such deliverance).
* 하이델베르그교리문답 1~2문 설교 동영상 시청
1. 위로는 여호와의 자비다.
로마서 15:4에서 우리는 성경이 단지 우리를 교훈할 뿐 아니라, 우리에게 소망을 주기 위해서 격려하고 또 위로도 한다는 사실을 읽을 수있습니다. “무엇이든지 전에 기록한 바는 우리의 교훈을 위하여 기록된 것이니 우리로 하여금 인내로 또는 안위로 소망을 가지게 하려 함이니라.” 그러므로 본 교리문답은 위로의 책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본 교리문답은 성경의 이 목적을 반영하고 있습니다. 왜냐하면 이것 역시 우리에게 위로를 주기 위해서 노력하기 때문입니다. 게다가 본 교리문답이 작성된 시기 역시 우리에게 위로를 주는 말로 시작하는 이유를 이해하는데 힌트를 줍니다. 종교개혁이 일구어낸 가장 값진 결과는 교회가 이단적인 교리 때문에 오랫동안 잃어버렸던 위로를 찾았다는 데에 있습니다. 여호와의 백성들이 “행위 구원”이라는 교리에 짓눌려 있는 한(선행을 통해서 자기의 구원을 이루려는 행위), 참 위로가 없고, 또 영혼에 안식을 얻지 못했습니다. 오늘날 우리가 알고 있듯이, 여호와의 참 백성들은 자신의 죄가 얼마나 큰지를 알았습니다. 그들 역시 여호와의 요구가 얼마나 큰지를 잘 알았습니다. 이 요구는 결코 죄성을 가진 사람으로서는 성취할 수 없는 것입니다. 이들은 만일 구원이 자신의 행위에 의존해 있다면, 자신의 구원에 대한 확신을 결코 얻지 못할 것이라는 사실을 잘 알고 있었습니다. 왜냐하면 자신들은 구원 받을 만큼 충분히 선행을 할 수 있을는지에 대해서 확신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또 다른 이유는 그 당시의 정치적 종교적인 풍토에 놓여 있습니다. 종교개혁 벽두에는 핍박이 대단했던 시기였습니다. 이러한 사실은 프랑스의 위그노에게 특별히 해당되었고, 이들 중에 많은 사람들이 자신의 믿음 때문에 순교를 당해야 했습니다. 이런 핍박의 소식이 종교개혁 전 시기에 걸쳐 전해졌습니다. 이와 같은 고통스러운 시기에 올레비아누스와 우르시누스가 위로의 말로 시작하는 것은 대단히 적절했습니다.
우리가 “위로”라는 말을 어떻게 정의할 수 있을까요? 위로라는 말은 여호와께서 약속하신 자비로부터 우러나오는 마음의 평안이며, 또 이것은 두려움과 걱정과 슬픔을 덜어주는 것입니다. 이 두려움은 우리 안에서 무엇을 일으킵니까? 이 걱정은 무엇을 유발시킵니까? 어디에서부터 이 슬픔이 일어납니까? 바로 죄 가운데서 우리의 타락으로부터입니다! 우리의 죄는 우리의 거룩하시고 의로우신 여호와의 진노를 유발시킵니다. 게다가 우리의 죄는 여호와의 저주라는 형벌을 받게 만듭니다. 그리고 이 저주의 결과로 고통, 질병, 죽음이 온 것인데, 이 모든 것이 슬픔을 생성시킵니다.
우리가 앞에서 정의하면서 언급했듯이, 위로는 여호와의 자비하심으로부터 일어납니다. 이런 사실은 고린도후서 1:3에서 바울이 말씀한 바로부터 명확해지는데, 여기에서 바울은 여호와를 “자비의 아버지시며 또 모든 위로의 여호와”이시라고 기술해 놓았습니다. 위로의 유일한 출처는 여호와께서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에게 보여주신 당신의 자비하심에 있습니다. 바로 이것이 본 교리문답이 “당신의 유일한 위로는 무엇입니까(What is your only comfort in life and death)?”라고 말한 이유입니다. 우리의 은혜로우신 여호와로부터 우리의 죄 사함과 그리스도의 의를 통해서 오는 위로 외에 다른 위로란 있을 수 없습니다. 이사야 40:1에서 우리는 “너희 여호와가 가라사대 너희는 위로하라, 위로하라, 내 백성을 위로하라. 너희는 정다이 예루살렘에 말하며 그것에게 외쳐 고하라. 그 복역의 때가 끝났고 그 죄악의 사함을 입었느니라.”는 말씀을 읽을 수 있습니다. 이스라엘의 위로는 이스라엘의 형벌이 여호와의 죄사하심 때문에 종식되리라는 여호와의 약속에 근거를 두고 있습니다.
여호와의 은혜로부터 나오는 위로를 거절하거나 무시하는 불신자는 다른 곳에서 위로의 근원을 찾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들이 이생에서 발견할 수 있는 최대의 것은 죄의 비참한 결과로부터 얼마간에 일시적인 유예에 불과합니다. 이들은 얼마만큼 부를 축척할 수도 있고, 또 멋진 집이나 맛있는 음식과 같은 육신적인 위로를 어느 정도 즐길 수 있습니다. 그래서 추위에서 떠는 불행을 당하지 않고, 굶주림의 고통에 시달리지 않을 수도 있습니다. 또 세상 사람들은 의술의 진전을 이룰 수 있고, 또 이로 인하여 사람들이 달리 경험하는 어떤 고통이나 괴로움을 완화할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이와 같은 “위로”는 단지 겉으로 보이는 육체(the outward body)에 영향을 줄 뿐입니다. 그러나 신자들은 마음의 평안을 누립니다. 그의 영혼은 속에서 평온합니다.
2. 위로는 예수 그리스도에게 속해 있다
하이델베르그교리문답은 우리의 위로를 예수 그리스도에게 속해 있는 것으로 정의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에게 속했다는 것의 의미는 무엇입니까? 이 말은 우리가 그분이 책임져야 할 대상이 되었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분은 친히 우리의 구세주시며, 우리의 구속주시며, 우리의 보호자시며, 우리의 공급원이 되셨습니다. 누구든지 이 사실을 아이와 비교할 수 있을 것입니다. 아이들이 가득한 방에 누군가가 어머니에게 “당신에게 속한 아이가 어떤 아이죠?”라고 묻습니다. 부모들은 자녀들에게 필요한 것을 채워주고, 인도하고 해로운 것으로부터 보호하고, 잘 되도록 유의할 책임이 있습니다. 빈곤과 기근이 극심한 제 3세계에 사는 고아들의 생활은 결코 편안한 생활을 하지 못합니다. 고아는 어느 누구에게도 속해 있지 않습니다. 그러나 그는 스스로 설 수도 없고, 자기를 위해서 양식을 공급해줄 사람도 없습니다. 이런 고아에게 생활에 필요한 것을 공급해주는 사랑하는 [양]부모에 의해서 양자로 받아들여진다면 그가 느낄 수 있는 기쁨을 여러분들은 상상할 수 있겠습니까? 자기가 누군가에게 속한다는 것이나 자신의 생활이나 안녕에 기꺼이 책임을 진다는 것을 아는 것은 엄청난 위로가 됩니다. 이것이 예수 그리스도에게 속해 있는 사실이 의미하는 바입니다. 우리는 고아와 같았습니다. 아니 이보다 더 비참했습니다! 우리는 스스로 죄로 말미암아 사탄에게 팔아버렸습니다. 우리는 사탄의 자녀가 되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탄은 우리의 안녕을 전혀 구하지 않았습니다. 다시 말해서 사탄은 우리를 황폐하도록 만들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에게 속해 있다는 것이 얼마나 경이롭습니까!
하이델베르그교리문답은 내가 몸과 영혼이 예수 그리스도께 속해 있다고 말합니다. 이 말은 내가 그분에게 완전하게 속해 있다는 것입니다. 나의 모든 것이 그리스도에게 속해 있습니다. 나의 영혼만이 그분의 것이 아니라, 나의 몸도 그분의 것입니다. 그분은 나를 완전하게, 전적으로 소유하셨습니다. 바울은 이 사실을 고린도전서 6:19-20절에 기록하였습니다
그렇다면 본 하이델베르그교리문답은 살아서나 죽어서나 나는 나의 것이 아니요, 몸도 영혼도 나의 신실한 구주 예수 그리스도의 것입니다(That I am not my own, but belong with body and soul, both in life and in death, to my faithful Saviour Jesus Christ). 내가 사나 죽으나 그분의 것이라고 말합니다. 이 말은 내가 그분에게 항상 속해 있다는 것을 말하는 것입니다. 내가 단지 이생에서만 그리스도께 속한 것이 아닙니다. 심지어 내가 죽을 때에도 나는 여전히 그리스도에게 속해 있습니다. 모든 상황에서, 언제든지, 나는 나의 구속자에게 속해 있습니다. 아무 것도 그분과 나를 갈라놓을 수 없고 끊을 수 없다고 했습니다. (로마서 8:38, 39)
우리가 그리스도에게 속해 있기 때문에, 우리는 하늘에 계신 아버지와 특별한 관계 속에 들어갔습니다. 본 교리문답은 “하늘에 계신 나의 아버지(my heavenly Father)”에 대해서 말합니다. 그리스도께서 행하신 일 때문에, 하늘에 계신 아버지께서 우리를 당신의 자녀로 양자 삼으신 것입니다. 이 말은 이제 우리가 하늘에 계신 아버지의 돌보심 하에서 있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분은 우리의 유익을 위해서 돌보십니다. 하늘에 계신 나의 아버지의 뜻이 아니면, 머리털 하나도 땅에 떨어지지 않도록 나를 보호하시며, 참으로 모든 것이 합력하여 나의 구원을 이루도록 하십니다(He also preserves me in such a way that without the will of my heavenly Father not a hair can fall from my head; indeed, all things must work together for my salvation). 우리 머리의 머리터럭 하나라도 아버지의 뜻이 없이는 땅에 떨어지지 않습니다. 그리고 심지어 우리에게 안 좋은 일이 발생한다고 하더라도,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우리에게 일어나는 모든 것이, 심지어 우리가 이것이 어떻게 가능한지에 대해서 전혀 이해할 수 없다고 하더라도, 우리의 구원을 이루는 데로 진행된다는 것을 확신할 수 있습니다. 여호와께서는 우리보다 훨씬 지혜로우십니다.
3. 위로는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사셨다.
어떻게 우리가 그리스도께 속하게 됩니까?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사셨습니다. 그분은 우리의 죄 값을 지불해주셨습니다. 금이나 은으로가 아니라, 당신의 보혈로 말입니다. 그분은 당신의 고난 받으심과 죽으심을 통해서 우리를 사셨습니다. 이것이 죄와 사망의 종으로부터 우리를 해방하기 위해서 반드시 지불되어야 할 값인 것입니다. 그리고 이제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해방시키셨다는 것은 우리가 다시 죄의 종으로 들어가지 않는 한 우리를 계속해서 지켜주신다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사탄은 우리를 정복할 힘을 얻고자 애씁니다. 또 그는 이전처럼 우리를 종으로 삼고자 합니다. 그러나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보존해주시고 또 다시 사탄의 지배 아래에 들어가지 않도록 하실 것입니다. 그리스도께서는 그의 보혈로 나의 모든 죗값을 완전히 치르고 나를 마귀의 모든 권세에서 해방하셨습니다(He has fully paid for all my sins with His precious blood, and has set me free from all the power of the devil). 그분은 우리를 끝까지 보존하시고 신실하게 남아 있게 하실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에게 속한다는 것은 우리가 원하는 것이라면 무엇이든지 할 수 있게 되었다는 의미에서 자유롭다는 뜻이 아닙니다. 본 하이델베르그교리문답은 “나는 나의 것이 아니요(That I am not my own)”라고 고백합니다. 우리는 사탄의 통제로부터 자유롭게 되었고, 우리는 그리스도에게 속했습니다. 사탄은 이전에 우리를 통치했지만, 이제 우리는 그리스도에 의해서 통치 받습니다. 그분은 우리를 그의 영과 말씀으로 다스리십니다. 이제 그분은 우리에게 하라고 말씀하신 것을 우리는 반드시 해야만 합니다. 우리는 그분에게 순종해야만 합니다. 그분은 우리의 주님이시자, 우리의 주인이십니다(로마서 6:15-23을 참조하라).
물론 우리 스스로는 그렇게 할 수 없습니다. 본성상 우리는 반역하고 또 우리의 뜻대로 하고자 합니다. 또 우리의 죄의 본성은 우리를 괴롭힙니다. 우리 스스로 그리스도의 다스림에 순복할 수 있습니까? 그러나 여기에서도 역시 우리는 위로를 받습니다. 왜냐하면 그리스도께서 우리 마음에 당신의 성령으로 역사하시겠다고 약속하셨습니다. 그렇게 하여 우리는 전심으로 기꺼이 그분께 순종합니다. 바울은 엡 2:13에서 “이제는 전에 멀리 있던 너희가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그리스도의 피로 가까와졌느니라”고 기록했습니다.
그리스도에게 속한 위로를 경험하기 위해서, 우리가 세 가지 지식을 아는 것이 필요합니다. 우리는 우리의 죄와 비참함이 얼마나 큰지를 알아야만 합니다. 우리의 죄와 비참을 아는 지식 그 자체만으로는 위로가 있을 수 없습니다. 이 사실은 우리에게 우리 스스로에 대해서 매우 나쁘다는 것을 알도록 만들 뿐 입니다. 우리의 죄와 비참에 대한 지식은 우리로 하여금 겁에 질리도록 만듭니다. 그러나 이 지식은 반드시 필요합니다. 왜냐하면 이 지식은 우리로 하여금 죄와 비참으로부터 치유 받고자 찾도록 만들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아프다는 사실을 알지 못하는 한, 우리는 좀처럼 병원에 가질 않습니다. 동일한 방식으로 어느 누구도 자신의 죄와 비참을 먼저 알게 되지 않는 한, 죄와 비참으로부터 구속을 갈망하지 않을 것입니다.
본 교리문답은 우리가 우리의 죄와 비참함이 얼마나 큰지를 반드시 알아야 한다고 말합니다. 만일 우리가 기침을 하거나 아니면 가벼운 질환을 앓는다면, 우리는 의사에게 달려가지 않습니다. 우리가 만일 꽤 심각한 질병에 들었거나, 또 혼자 외출할 수 없을 정도가 되었다면, 급히 병원에 갑니다. 이것은 본 교리문답이 우리에게 가르치지는 바입니다. 다시 말해서 우리의 죄가 아주 심각하다고 진단했습니다. 죄는 영원한 죽음으로 이끌 것입니다. 게다가 본 교리문답은 우리가 소위 “가벼운 질환”이라고 생각하는 것조차도 홀로 혹은 우리의 도움으로 해결할 수 없다고 우리에게 가르칩니다. 우리는 영적인 의사가 필요합니다.
우리가 가공스러운 질병에 걸렸고 또 죽어가고 있다는 사실을 아는 것으로 위로가 되지 않습니다. 사실상 환자가 회복될 조짐이 보이질 않는다면, 의사는 질병이 얼마나 중증인지를 환자에게 말하는 것을 마음에 내켜하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중증이라는] 이 지식은 환자들에게 아무런 도움도 주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어떤 점에서 모르는 것이 행복할 수 있습니다. 이 같은 지식이 실제로 어떤 유익이 있다는 것은 회복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이 사실은 우리의 죄와 비참에 대한 지식과도 동일합니다. 만일 죄 사함과 구속이 없다면, 우리는 우리의 영적인 상태에 대해서 무지한 채로 있는 것이 차라리 나을 것입니다. 그러나 치유할 길이 있다면, 우리는 우리를 치료할 수 있는 의사에게 가서 우리의 질병에 대해서 말해야만 합니다.
이와 같이 우리의 죄와 비참이 얼마나 큰지에 대한 지식은 우리가 만일 동시에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구속을 듣는다면 우리에게 위로가 될 것입니다. 이처럼 이 지식의 두 번째 측면, 이것은 우리가 위로받기 위해서 반드시 알아야 하는 것인데, 구원에 관한 지식 즉 우리 주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다는 것입니다.
본 하이델베르그교리문답은 우리의 위로 역시 우리가 어떻게 이와 같은 구원에 자원하여 감사함을 보이는 방법에 대한 지식에 달려 있다고 말합니다. 그 이유는 이중적입니다.
a) 첫째로, 여호와에 의해서 구속함을 받은 우리는 그의 뜻에 일치하게끔 행함으로 그분께 우리의 감사를 보이도록 요구받았습니다. 여호와께서는 계속해서 죄 가운데 사는 자에게 진노하십니다. 그러나 우리는 본성상 여호와의 뜻을 알 수 없습니다. 우리는 여호와의 은혜에 대해서 그분께 감사를 어떻게 해야 할지를 알지 못합니다. 여호와께서 우리에게 선한 것과 여호와께 받아들여질 수 있는 것이 무엇인지를 반드시 가르쳐주셔야 합니다. 만일 우리가 그분의 뜻에 따라 살고 있다는 사실을 안다면 여호와께서 우리를 흡족해 하시는 것을 알 수 있는 위로를 받을 수 있습니다.
b) 둘째로, 여호와께서 그리스도를 통해서 죄로부터 구속하신 우리가 성령을 통해서 감사의 열매를 맺게 하실 것을 약속하셨습니다. 이 두 가지 사실은 함께 움직입니다. 그리스도의 구속사역과 감사라는 영적인 열매는 분리할 수 없습니다. 만일 우리가 우리의 생활에서 감사의 열매를 만드시는 성령[의 사역]을 볼 수 있다면, 그렇다면 우리는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구속하셨다는 확신을 동반하는 위로를 받게 될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가 우리 안에 역사하시는 성령의 사역을 인식하기 위해서는 이 감사의 열매들이 무엇인지를 반드시 알아야만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