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이델베르그교리문답 27문~28문으로 은헤를 나누고자 합니다.
- 목차 -
1. 여호와의 섭리.
2. 여호와의 통치.
3. 여호와의 섭리를 믿는 자의 삶
하이델베르그교뢰문답 제 27문: 여호와의 섭리란 무엇입니까? (What do you understand by the providence of God)?
답: 섭리란 여호와의 전능하고 언제 어디나 미치는 능력으로, 여호와께서 마치 자신의 손으로 하듯이, 하늘과 땅의 모든 피조물을 여전히 보존하고 다스리시는 것입니다. 그리하여 잎새와 풀, 비와 가뭄, 풍년과 흉년, 먹을 것과 마실 것, 건강과 질병, 부와 가난, 참으로 이 모든 것이 우연이 아니라 아버지와 같은 그의 손길로 우리에게 임합니다
(God's providence is His almighty and ever present power, whereby, as with His hand, He still upholds heaven and earth and all creatures, and so governs them that leaf and blade, rain and drought, fruitful and barren years, food and drink, health and sickness, riches and poverty, indeed, all things, come not by chance but by His fatherly hand).
하이델베르그교뢰문답 제 28문: 여호와께서 모든 것을 창조하시고 섭리로써 여전히 보존하심을 아는 것이 우리에게 어떤 유익을 줍니까?
(What does it benefit us to know that God has created all things and still upholds them by His providence)?
답: 우리는 어떤 역경에서도 인내하고, 형통할 때에 감사하며, 또한 장래 일에 대해서도 우리의 신실하신 여호와 아버지를 굳게 신뢰하여 어떠한 피조물이라도 우리를 여호와의 사랑에서 끊을 수 없으리라 확신합니다. 모든 창조물이 완전히 여호와의 손 안에 있으므로, 그의 뜻을 거슬러 일어나거나 되는 일은 하나도 없습니다(We can be patient in adversity, thankful in prosperity, and with a view to the future we can have a firm confidence in our faithful God and Father that no creature shall separate us from His love; for all creatures are so completely in His hand that without His will they cannot so much as move).
1. 여호와의 섭리
“섭리(providence)”라는 말은 우리가 여호와의 능력, 즉 이것으로 여호와께서 당신이 창조하신 만물을 통치하시고 다스리신다는 것을 뜻합니다. 발생하는 모든 것은 여호와의 뜻에 따라 그리고 충만한 때에 여호와의 계획에 따라 일어납니다. 본 교리문답은 어떤 것이라도 여호와의 통제하심이라는 영역 밖에서 일어날 여지를 남겨놓지 않았습니다. 만물이 여호와의 능력 안에 있습니다. 심지어 우리가 생각할 수 있는 가장 사소한 일들조차도 여호와의 지휘하심 안에 있습니다. 주의 날 제1주일에서 우리가 “나의 아버지의 뜻이 아니고서는 나의 머리에서 머리터럭 한 올도 떨어지지 않습니다.”라고 말할 때에 이 사실을 고백했습니다. 우리 머리의 머리터럭 한 올보다 더 사소하고 미미한 것이 또 있겠습니까? 그러나 여호와는 심지어 그와 같은 사소한 사건들도 통제하십니다. 여호와에 의해서 주권적으로 통제되지 않는 것이란 이 우주 안에 절대적으로 아무 것도 없습니다.
만일 사실이 그러하고 또 그렇다면, 그때 우연이나 숙명이나 운명이나 행운과 같은 것은 있을 수 없습니다. 여호와의 섭리는 [행운을 상징하는] 토끼의 발톱이나 혹은 네 잎 클로버와 같은 부적들에 대해서 믿거나 아니면 대화할 여지를 남겨두지 않습니다. 여호와의 섭리는 검은 고양이나, 깨진 거울조각이나, 13일 금요일과 같은 미신도 남겨둘 여지가 없습니다. 왜냐하면 이 우주 안에는 여호와에 의해서 인격적이건 비인격적이건 상관없이 통제받지 않는 세력이란 아무 것도 없기 때문입니다. 여호와는 주권적이신데, 다시 말해서 여호와는 만물을 통제하십니다. 여호와는 무엇이 일어날 것인지, 그리고 언제, 어디에서, 어떻게 일어날 것인지를 결정하십니다. 이것이 여호와의 섭리입니다.
2. 여호와의 통치
주의 날 제9주일에서 우리는 여호와가 우리의 유익을 위해서 만물을 다스리신다고 고백했습니다. 이렇게 말하면서 본 교리문답은 단순하게 사도 바울이 기록했던 바를 인용하였습니다. “우리가 알거니와 여호와를 사랑하는 자 곧 그 뜻대로 부르심을 입은 자들에게는 모든 것이 합력하여 선을 이루느니라.”(롬8:28)
만물이 우리의 유익을 위해서 함께 움직인다는 것은 우리가 생각한 대로 만물이 움직여줄 때에 그럴 것이라고 쉽게 믿습니다. 우리는 건강이나 번영이 우리에게 유익하리라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우리가 질병이나 빈곤과 같은 종류에 대해서도 동일하게 생각합니까? 우리가 큰 어려움을 겪게 될 때에, 여호와의 섭리를 믿는 것이 더욱 힘들어집니다. 만일 어떤 가정에 자녀들이 있는 어머니나 아버지가 죽는다면, 우리는 이와 같은 죽음에 대해서 그 자녀들에게 유익한 것으로 보기가 힘들 것입니다. 일반적으로 어머니나 아버지는 “어떻게 이런 일이 우리의 유익이 되며 또 우리 자녀들에게 유익이 될 수 있단 말이요?”라고 의아해 할 수 있습니다. 우리는 부모가 가정에 계속 있어야 할 중대한 필요성을 잘 알고 있습니다. 모든 자녀들에게 어머니와 아버지가 필요합니다. 그러나 심지어 이와 같이 아버지와 어머니가 자녀들을 남기고 일찍 죽었을 때에도, 우리는 어려움 속에서 여호와의 섭리를 믿어야 합니다. 우리는 여호와가 이를 위한 한 목적을 가지고 계신다는 사실을 믿어야 하고 또 믿습니다. 우리는 만물과 마찬가지로 이것은 우리에게 유익하고 또 우리 구원에 유익하다는 사실이 판명되리라고 믿어야만 하고 또 믿습니다.
우리가 여호와의 섭리에 대해서 말할 때에, 죄와 악에 관한 질문도 이 그림 속에 들어옵니다. 즉 “이 또한 여호와의 손이 해결할 수 있을 것인가?”라고 말입니다. 우리는 여기에서 주의깊고도 신중하게 말해야만 합니다. 여호와는 만물을 선하게 창조하셨으나, 그러나 [인류의 타락으로 인하여] 만물은 더 이상 선하지 않습니다. 여호와의 선하신 피조물 가운데 일부가 사탄과 사람의 타락으로 인하여 그 탁월성을 상실해버렸습니다. 우리 주변에 널려 있는 이런 악은 여호와의 백성들의 생활을 어렵게 만듭니다. 우리는 이 또한 여호와의 통제하심 안에 있다고 믿습니까? 아니면 사단이 자기가 좋아하는 대로 자유롭게 주장할 수 있다고 생각하십니까?
여기에서 또한 우리는 여호와의 섭리를 공언합니다. 여호와의 통제하심에 벗어난 방식으로 처신할 수 있는 어떤 피조물 즉 사단이나 사람도 없습니다. 여호와는 죄나 악을 창조하지 아니하셨습니다. 그러나 그분은 분명히 죄와 악을 통제하십니다. 여호와는 당신께서 하고자 하시는 자들을 강퍅하게 하시고, 그리고 그분은 당신이 기뻐하시는 자의 마음을 누그러뜨리십니다(롬9장). 이런 사실은 바로의 경우에서 분명하게 나타납니다. 바로는 전적으로 여호와의 능력 안에 있었습니다. 바로는 여호와께서 하도록 허락하신 것만 할 수 있었습니다. 여호와는 바로에게 죄 짓는 원인을 제공하지 않으셨습니다. 그러나 여호와는 확실하게 이 죄를 통제하셨습니다. 여호와는 죄를 어거하실 수 있으시고, 또 종종 어거하십니다. 여호와는 사단과 악한 사람들이 자유자재로 파괴적인 행각을 벌이는 것을 막으십니다.
여호와께서 악한 자의 파괴적인 행각들을 막으실 수 있다면 죄를 허용하신 이유는 무엇입니까? 여호와께서 당신의 목적과 경륜을 성취하시고자 죄와 악을 사용하실 수 있으시기 때문에 죄와 악을 허용하신 것입니다. 여러분은 요셉의 이야기를 기억하고 계시죠? 요셉의 형제들이 어떻게 요셉을 종으로 팔았는지를 기억하십시오. 요셉의 형제들은 요셉을 파멸시키기로 작당하였습니다. 분명히 요셉이 유괴를 당했을 때에, 요셉은 주님께 “주님, 왜 이런 일이 저에게 일어나도록 허용하셨습니까?”라고 물었습니다. 요셉은 여호와께서 왜 이리도 끔찍스러운 일을 막으시기 위해서 간섭하지 아니하셨는가? 의아해 했습니다. 그러나 창세기 50장 20절에서 우리는 요셉이 그의 형제들에게 “당신들은 나를 해하려고 하였으나, 여호와는 그것을 선으로 바꾸사 오늘날과 같이 만민의 생명을 구원하게 하려하셨나이다.”라고 말한 것을 읽을 수 있습니다. 여호와께서는 요셉의 형제들의 죄를 사용하셔서 야곱의 가족을 유익하게 하셨습니다. 여호와께서는 그들의 유익을 위해서 악한 상황을 사용하셨습니다. 어쨌든 유익한 것으로 판명되었기에, 이 사실이 잘못을 저지른 사람들에게 변명할 기회를 만들어주지 않습니다. 결코 그렇지 않습니다. 여호와께서 그들이 행했던 잘못에 대해서 심판하실 것입니다.
여호와의 섭리는 경건하지 못한 사람들이 임의대로 주관하는 것처럼 보일 때에도 믿어야만 하는 것입니다.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세계 제1차 대전 동안에 여호와는 강제 수용소에서 어디에 계셨나, 수많은 죄 없는 유대인들이 죽는 곳에서 어디에 계셨는가 하고 물었습니다. 수많은 사람들이 자신들이 이와 같은 끔찍한 사건들을 보고 듣고 난 뒤에 섭리의 여호와를 믿지 않노라고 공언하였습니다. 그러나 이와 같은 가공할만한 상황에서조차도(이와 같은 다른 일 즉 전쟁이나 지진이나 유행병에서도) 여호와는 만물을 통치하고 계십니다.
여호와께서 이런 일들이 발생하도록 허용하십니다. 왜 이와 같은 끔찍한 일들이 일어나도록 허용하십니까? 필시 이 일들이 불경건한 자들에게 심판을 집행하시기 위함이셨을 것입니다. 필시 이 일들은 여호와의 백성의 믿음을 단련시키기 위함이었을 것입니다. 정확한 이유들은 밝혀질 수 없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여호와께서 심지어 당신의 목적과 계획을 진척시키기 위해서 발생하는 악한 것조차도 사용하신다는 사실을 알고 있습니다. 삶의 모든 상황에서 여호와께서 이 세대가 완성되는 날 즉 그리스도의 재림하실 때까지 역사를 통제하시고 이끌어 가십니다.
3. 여호와의 섭리를 믿는 자의 삶
교회의 역사 속에서 여호와가 존재하신다고 말하고, 또 여호와가 세상을 창조하셨다고 말하나, 그러나 여호와는 더 이상 이 세상을 통치하심에 있어서 적극적인 활동을 하지 않으신다고 주장합니다. 이렇게 주장하는 사람들을 이신론자(Deists)들이라고 부릅니다. 이신론자들은 여호와는 이 세상을 시계와 같은 자가 통제(self-governing) 장치를 가진 기계로 만드셨다고 믿습니다. 여호와는 소위 [시계와 마찬가지로 세상을 만드실 때에] 태엽을 감아놓으셨고, 그렇게 하신 다음 여호와 편에서 어떤 계속적인 참여없는 채로 그 자체가 움직이도록 방치해놓았다고 이들은 주장합니다.
만일 이신론자들의 이러한 주장이 진실이라면, 그렇다면 거기에는 기도라는 방편을 사용해야 할 여지가 없습니다. 만일 만물이 일종에 기계에 따라 움직인다면, 그렇다면 여러분이 잠자코 있어야만 하는데(기도해서는 안 되는데), 왜냐하면 기계는 그 경로를 들을 수도 변화시킬 수도 없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여호와의 섭리에 대해서 알기에, 우리는 기도하는 것입니다. 만일 여호와께서 다스리시지 않는다면, 기도를 사용해야 할 여지가 전혀 없습니다. 기도하는 것은 무익한 일이고, 아무런 소용이 없는 일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여호와께서 만물을 통치하신다는 사실을 알기 때문에, 우리는 어떤 상황에서든지 여호와께 도움을 구할 수 있습니다.
여호와의 섭리에 관한 교훈은 우리로 하여금 어려울 때에 인내하도록 만듭니다. 이와 같은 때에 인내는 여건이 더 호전될 것이라고 기대하는 것보다 그 이상을 뜻합니다. 이것은 우리가 여호와께서 우리의 유익을 위해서 역경을 보내셨기 때문에, 역경을 자원하여 받아들일 수 있습니다. 우리가 역경이 다가올 때에 투덜거리면서 불평할 때마다, 우리는 우리를 돌보시는 여호와의 섭리적인 손길을 신뢰하지 않는 것을 드러내는 것입니다. 이렇게 하는 것은 우리의 최상의 은혜로우신 아버지를 참으로 근심시켜드리는 것입니다!
여호와의 섭리 교리는 우리를 번성할 때에도 감사하도록 만듭니다. 역경을 만났을 때에도 감사하는 것은 단순한 행복감 내지는 즐거움 훨씬 더 이상의 일입니다. 그 배경에 이것에 대해서 여호와께 감사하거나 혹은 여호와의 섭리에 대한 생각이 없을 때조차도 우리가 잘 되어 갈 때에 즐거워하는 것은 얼마든지 가능합니다. 게다가 우리는 일이 잘 될 때에 여호와를 의지하는 것을 대단히 쉽게 잊어버릴 수 있습니다. 또 우리가 일들을 통제하면서 일을 하려고 생각합니다.
이 섭리 교리는 또한 우리에게 영원한 안전보장에 대한 확고한 소망을 줍니다. 어떤 피조물 즉 물리적인 세력이든 영적인 세력이든 우리를 여호와의 사랑에서 떼어낼 수 있는 것이 아무 것도 없습니다. 왜냐하면 여호와께서 영적인 피조계와 마찬가지로 물리적인 피조계도 다스리시기 때문입니다. 바울은 웅변적으로 미래에 대한 자신의 확신을 다음과 같이 피력했습니다. “내가 확신하노니 사망이나 생명이나 천사들이나 권세자들이나 현재 일이나 장래 일이나 능력이나 높음이나 깊음이나 다른 아무 피조물이라고 우리를 우리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여호와의 사랑에서 끊을 수 없으리라.”(롬8:38,3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