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이델베르그교리문답 6~8문으로 여호와의 형상대로 창조한 사람과 전적으로 타락한 사람 그리고 타락의 결과에 대해 나누어 보고자 합니다.
- 목차 -
1. 형상대로 창조한 사람
2. 전적으로 타락한 사람
3. 타락의 결과
하이델베르그교리문답 제6문: 그러면 여호와께서는 인간을 그렇게 악하고 패역한 상태로 창조하셨습니까?
(Did God, then, create man so wicked and perverse)?
답: 아닙니다. 여호와는 사람을 선하게, 또 자신의 형상 곧 참된 의와 거룩함으로 창조하셨습니다. 이것은 사람으로 하여금 자신의 창조주 여호와를 바르게 알고, 마음으로 사랑하며, 영원한 복락 가운데서 그와 함께 살고, 그리하여 그 분께 찬양과 영광을 돌리기 위함입니다
(No, on the contrary, God created man good and in His image, that is, in true righteousness and holiness, so that he might rightly know God His Creator, heartily love Him, and live with Him in eternal blessedness to praise and glorify Him).
하이델베르그교리문답 제7문: 그렇다면 이렇게 타락한 사람의 본성은 어디에서 왔습니까?
(From where, then, did man's depraved nature come)?
답: 우리의 시조 아담과 하와가 낙원에서 타락하고 불순종한 데서 왔습니다. 그때 사람의 본성이 심히 부패하여 우리는 모두 죄악 중에 잉태되고, 출생합니다(From the fall and disobedience of our first parents, Adam and Eve, in Paradise, for there our nature became so corrupt that we are all conceived and born in sin).
하이델베르그교리문답 제8문: 그렇다면 우리는 그토록 부패하여, 선은 조금도 행할 수 없으며 온갖 악만 행하는 성향을 지니고 있습니까?
(But are we so corrupt that we are totally unable to do any good and inclined to all evil)?
답: 그렇습니다. 우리가 여호와의 성령으로 거듭나지 않는 한 참으로 그렇습니다
(Yes, unless we are regenerated by the Spirit of God).
1. 여호와의 형상대로 창조한 사람
사람은 본성상 여호와(로마서 8:7절)과 이웃(디도서 3:3절)을 미워하는 경향성이 있습니다. 여기에서 여호와를 미워한다는 말은 우리가 여호와의 율법을 성취할 수 없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여호와께서 마음에서 우러나오는 순종을 원하십니다. 이처럼 사랑은 모든 계명의 뿌리라고 할 수 있고, 또 사랑은 율법의 성취라고 할 수 있습니다(로마서 13:10절). 그리스도께서 “나를 사랑하면 내 계명을 지키라”고 말씀하셨습니다(요한복음 14:15). 더욱이 사람은 여호와를 미워하고 또 불순종하는 압도적인 경향성이 있습니다.
본 주의 날은 “그러면 여호와께서는 인간을 그렇게 악하고 패역한 상태로 창조하셨습니까(Did God, then, create man so wicked and perverse)? 여호와께서 인간을 그렇게 악하고 비뚤어지게 창조하셨습니까?”라고 묻습니다. 여호와께서 사람을 의도적으로 그렇게 불순종하고 완고하도록 창조하셨습니까? 사람이 이 악한 본성을 야기(惹起)시킨 죄책을 피하고자 하기 때문에 이렇게 묻는 것입니다. 우리가 만일 “그렇습니다. 여호와께서 이렇게 만드셨습니다.”고 대답한다면, 그 때 그 죄책은 우리가 아니라 여호와께서 지시게 됩니다. 그러나 본 교리문답은 즉각적으로 여호와의 순수무구하심과 거룩하심을 지지합니다. 이것은 여호와의 실책이 아닙니다. 그분은 사람을 선하고 의롭고 거룩하게 창조하셨습니다. 여호와께서 사람을 창조하실 때에, 사람은 여호와와의 바른 관계를 즐겼습니다. 사람은 죄를 짓도록 하는 어떤 점도 흠도 없이 순결했습니다. 사람은 여호와의 뜻에 자신의 의지에 순응할 수 있었습니다. 사람은 여호와께서 요구하신 것을 행할 수 있었습니다.
성경은 여호와께서 사람을 당신의 형상대로 창조하셨다고 말씀합니다. 형상이란 어떤 사물 혹은 누군가를 닮음을 말하거나 반영을 의미합니다. 사람은 여호와의 모양을 반영했습니다. 우리가 여호와의 형상을 담지했다는 것은 우리가 외견상 여호와와 같다는 뜻이 아닙니다. 오히려 이 말은 우리가 여호와께서 완전하심으로 소유하셨던 자질들을 반영하는 범위 안에서 여호와를 닮았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사람을 생각할 수 있는 마음을 받았습니다. 사람은 사랑할 수 있는 마음을 받았습니다. 사람은 공의와 선한 것과 의로운 것을 알 수 있도록 지음 받았습니다. 이러한 것들은 여호와 안에서 발견되는 자질들입니다. 이런 면에서 우리는 여호와를 닮았습니다.
사람이 하나의 형상을 담지하고 있다고 할 때에 두 번째 요인이 있는데, 그것은 다름 아닌 직분 혹은 직무입니다. 교회 안에서 어떤 형제가 장로나 집사나 목사와 같은 직분을 받듯이, 사람은 여호와의 형상을 담지하고 있는 직분을 여호와께로부터 받았습니다. 직무에서 사람은 땅 위에서 여호와의 형상을 반영합니다. 사람은 여호와를 대신해서 피조물을 다스리는 높은 지위를 부여받았습니다. 그는 자신의 여호와와 같은 자질들을 사용함으로 여호와를 대신합니다.
2. 전적으로 타락한 사람
사람이 이렇게 영광스럽게 창조된 후에, 여호와께서 사람에게 금지조항을 주셨습니다. 이 말은 사람이 시험을 받아야 한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여호와께서 사람의 신실함 즉 사람이 복종하는지 아니면 하지 않는지를 시험하기를 원하셨습니다. 여호와께서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의 실과는 먹지 말라 네가 먹는 날에는 정녕 죽으리라 하시니라”고 말씀하셨습니다(창2:17). 그 당시에 타락한 천사이자 여호와의 대 원수인 마귀가 사람에게 와서 시험했습니다. 마귀가 어떻게 사람을 시험했습니까? 진리를 왜곡시킴으로서 시험했습니다. 마귀는 여호와께서 말씀하셨던 것을 취하였고 또 그는 이 말씀이 거짓말이 되도록 조금 변화시켰습니다. 마귀는 매우 간교하고, 매우 교활합니다. 더욱이 마귀는 자기가 사람에게 제공하는 것이 여호와께서 사람에게 주신 것보다 더 낫게 보이는 방식으로 거짓말을 했습니다. 그래서 사람이 거짓말에 넘어간 것입니다. 사람은 뱀의 말을 경청함으로 여호와께 불순종했습니다.
우리는 여기에서 단지 아담과 하와만이 아닌 “사람”이라는 말을 듣습니다. 이렇게 말한 것은 아담이 여호와의 형상을 담지했을 뿐 아니라, 다른 위치를 견지하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아담은 또한 자기 뒤에 나올 모든 사람들의 머리(head)이자 대표자(representative)였습니다. 이것을 예로 들어 생각해봅시다. 교사가 학급의 35명의 학생 모두를 시험치려고 하지 않을 것입니다. 대신에 그는 학급을 대표하는 한 학생을 선출할 것입니다. 뽑힌 학생은 그 학급의 35명의 머리이자 대표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가 받은 시험지에 어떻게 표시하든 모든 학생에게 “전가되거나” 아니면 동일한 것으로 받아드려질 것입니다. 만일 그가 95점을 받았다면, 모든 학생이 이 보고서에 대해서 95점을 받은 것입니다. 그러나 만일 시험을 잘못 치렀다면, 그때는 마찬가지로 모든 학생이 잘못 치른 것이 됩니다. 한 학생이 모든 학생을 대신해서 치렀기 때문입니다.
비슷한 방식으로 여호와께서 아담을 자기 뒤에 출생하게 될 모든 인류의 머리이자 대표로 지명하셨습니다. 모든 후손이 아담으로부터 나올 것이기 때문에, 모든 사람이 그의 죄를 공유하는 것입니다. 아담이 행한 것은 자기에게만 영향을 준 것이 아니라, 모든 사람에게 영향을 준 것입니다. 아담의 죄는 그에게서 나올 모든 자녀들에게 “전가”된 것입니다. 바로 이것이 바울이 로마서 5:18-19에서 다음과 같이 말씀한 이유이기도 합니다. “한 사람의 범죄로 말미암아 사망이 그 한 사람으로 인하여 군림하였다면,… 한 사람의 불순종으로 말미암아 심판이 모든 사람에게 이른 것같이…” 이런 사실 때문에, 우리는 단지 아담의 타락에 대해서만 말해서는 안 되며, 반드시 우리의 타락에 대해서 말해야 합니다. 아담의 죄는 우리의 죄입니다. 우리는 이 첫 번째 죄를 “원죄”라고 부릅니다.
여러분들이 아마 “이것은 공정치 않아요! 왜 내가 아담의 죄 때문에 형벌을 받아야만 합니까?”라고 말할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여호와께서 아담에게 우리의 머리와 대표로서 독특한 지위를 주셨다는 사실을 반드시 기억해야만 합니다. 여호와의 목전에 선한 것을 행하시는 것은 창조주로서의 여호와의 권리이지 않습니까? 참으로 이것은 여호와의 권리입니다. 우리는 반드시 우리의 옳고 그름의 기준으로 여호와를 측량하지 않도록, 또 우리가 생각하는 공의의 기준으로 그분의 행위를 측량하지 않도록 주의해야만 합니다. 여호와께서는 한 사람 아담 안에서 모든 사람을 시험하실 권리를 가지고 계십니다. (나중에 다루게 될 제7주일에서, 우리는 여호와께서 다른 아담인 둘째 아담 즉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를 보내셨다는 사실을 보게 될 것입니다.) 여호와께서 그를 사람으로 세상에 보내셨는데, 그분은 아담이 실패한 시험을 받으셨습니다. 그분은 이 일을 우리의 머리이자 대표로서 행하셨습니다. 그분은 시험을 통과하셨고 또 여호와께서 그분이 완벽한 순종을 통해서 받은 점수를 우리의 것으로 돌리셨습니다.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는 이 시험을 통과합니다. 이 후자에 대해서 좀 더 설명해야 하겠습니다.
3. 타락의 결과
가. 원죄를 통해서(에덴동산에서 우리의 대표자인 아담의 죄), 사람은 유죄가 되었고 또 정죄 받게 되었습니다.
태어난 모 자녀들이 원죄를 공유합니다. 이 말이 의미하는 바는 모든 자녀들이 죄 가운데 잉태되어 태어났으며, 그러므로 정죄 하에 있게 되었습니다. 순진무구하게 태어나는 자녀란 있을 수 없습니다(베들레헴에서 태어나신 오래 전에 약속된 아이를 제외하고). 원죄는 가장 작은 어린아이조차도 정죄하기에 충분합니다. 감사하게도 신자들의 자녀는 아담의 불순종 행위를 공유했던 것처럼 그리스도의 의의 행위도 공유합니다. 신자들의 자녀는 이들이 자기의 새로운 머리이자 대표자인 그리스도에게 접붙임을 받았기 때문에 구원을 받은 것입니다.
나. 사람이 죄 가운데 타락하여 발생한 두 번째 결과는 사람이 타락하게(혹은 부패하게) 되었고 죄의 노예가 되었다는 것입니다.
원죄는 여호와 앞에서 사람의 법적인 입지만이 아니라, 사람의 본성 즉 기질까지도 영향을 받았습니다. 원죄의 결과로, 사람은 모든 것을 잃어버리게 되었으나, 그러나 여호와께서 창조 시에 사람에게 주셨던 특출한 자질들의 약간의 흔적만 남아 있습니다. 사람의 마음이 거짓으로 오염되었고, 그래서 그는 더 이상 바르게 생각할 수 없게 되었습니다. 사람의 마음이 강퍅하게 되어 더 이상 사랑할 수 없게 되었습니다. 태초에 사람은 자기의 의지를 여호와의 의지에 순응할 수 있었습니다. 그러나 죄의 나락으로 떨어진 후에 사람의 의지는 전적으로 악에로 기울어졌습니다. 그는 더 이상 선한 것을 행할 수 없게 되었습니다. 그는 더 이상 여호와를 대표하는 영광스러운 지위를 감당할 수 없게 되었습니다. 대신에 그는 마귀를 대표하게 되었습니다. 아담의 “원죄”는 사람에게 타락한 본성을 초래시켰고, 또 자연스레 사람에게 더 진전된 죄를 짓도록 유발시킵니다. 우리가 타락한 본성으로 인하여 범하는 죄들을 우리는 “실행죄 혹은 자범죄”라고 부릅니다.
사람의 죄는 자기를 저주 아래 두었습니다. 사람이 여호와께서 요구하시는 선을 행할 수 없기 때문에, 여호와께서 사람에게 주신 모든 축복을 보류하심으로 그를 벌하셨습니다. 이것이 타락 후에 사람에게 공포된 저주 아래 있는 사람의 모습이었습니다. 사람은 에덴동산에서 추방되었습니다. 사람은 매우 힘들여 일을 해야 했습니다. 그러나 그의 수고는 축복이 아니었습니다. 땅은 가시와 엉겅퀴를 내었습니다. 사람은 땅에서 즐거운 생활을 할 수 없었습니다. 그렇습니다. 그는 비참한 생활을 영위했습니다. 여자에게는 고통하면서 출산해야 하는 저주가 임했습니다. 병과 질병과 죽음이 죄를 통해서 세상에 들어왔고 또 땅 자체가 지진, 폭풍, 기근, 홍수와 같은 일에서 볼 수 있는 것처럼, 저주에 굴복하게 되었습니다.
게다가 사람은 영원한 죽음에 굴복하게 되었습니다. 이 말은 영원히 존재하는 것이 중단되었다는 것을 의미하지는 않습니다. 이 말은 영원한 죽음이 왔다는 것을 의미하지 않습니다. 영원한 죽음이란 여호와로부터 영원히 분리되는 것입니다. 여호와와 교제를 한다는 것은 생명이며 또 기쁨의 근원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타락한 사람은 더 이상 여호와와 교제하는 기쁨을 누릴 수 없게 되었습니다. 그는 여호와의 축복도 더 이상 즐길 수 없게 되었습니다. 그는 여호와와 아무런 관계없이 영원한 실존으로, 영원한 고통을 받은 실존으로 형을 언도받았습니다.
하이델베르그교리문답은 이 원죄가 모든 사람들에게 영향을 끼쳤고, 그들에게 총체적으로 영향을 끼쳤다고 강조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어떤 선도 행할 수 없습니다. 우리는 우리의 타락으로 인하여 여호와를 기쁘시게 할 수 있는 것이라고는 아무 것도 할 수 없게 되었습니다. 창세기 6:5이 말씀하는 바를 읽어보십시오. 여호와께서 사람의 마음에 생각하는 바 100%가 그 당대의 100% 사람의 부패함이 100%라는 것을 보셨습니다. 사람 안에 남아 있는 선이 전혀 없습니다(롬3:11-12;7:18). 우리의 최선의 행위는 누더기나 넝마와 같습니다(이사야 64:6을 참조하라). 또 우리의 마음은 지독하게 악합니다(예레미야17:9을 참조하라). 우리는 본성상 진노의 자녀이자 죄 가운데서 죽어 있습니다(엡2:3-5을 참조하라). 그리스도 예수의 구속하시는 은혜를 제쳐놓고는, 우리는 어떤 선한 열매를 낼 수 없습니다(요15:4-5을 참조하라). 성령의 중생케 하시는 사역을 제쳐놓고는, 아무도 여호와를 구할 수 없으며(롬3:11을 참조하라), 예수 그리스도를 자기의 주님이자 구세주로 고백할 수 없습니다(고전12:3을 참조하라).
그러나 우리 스스로가 이 타락을 제거할 수 있는 방법이 없습니까? 우리가 죄로부터 자유롭게 할 수 없습니까? 또 우리 더러운 옷을 갈아입듯이 우리의 더러운 본성을 갈아 치울 수는 없습니까? 그렇습니다. 우리는 스스로 변화시킬 수 없습니다. 우리는 우리의 마음을 고치고, 생활을 일신하고자 결정할 수도 없습니다. 우리는 표범의 얼룩점을 변하게 하는 것보다도, 이디오피아인들의 피부 색깔을 변화시키는 것보다 우리의 본성을 변화시키는 것이 더 어렵습니다. 그러나 본 교리문답은 선을 행할 수 있는 가능성을 모조리 부정하지 않았습니다. 우리 스스로 변화될 수 없는 반면에, 본 교리문답은 나중에 보게 될 것이지만 여호와께서 우리를 변화시킬 수 있다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우리가 할 수 없는 것을 여호와께서는 할 수 있고 또 그렇게 하십니다. 우리는 스스로 다시 깨끗하게 할 수 없으나, 그러나 여호와께서는 이렇게 하실 수 있습니다. 성경은 재창조에 대해서, 거듭남에 대해서 말씀합니다. 사람은 할 수 없으나, 여호와는 하실 수 있습니다. 그리고 그분은 처음 창조하신 분이시며, 또 그분은 우리를 재창조하십니다. 이것은 성령 여호와의 사역입니다.
이 재창조와 중생은 사람을 여호와를 섬길 수 있도록 되돌려 놓았습니다. 사람이 다시 여호와의 형상을, 이생에서는 완전하지 않다고 하더라도, 지닐 수 있게 되었습니다. 우리는 여호와의 형상으로 새롭게 지음 받았습니다. 우리 안에서 성령의 역사를 통하여, 우리는 여호와께 반응할 수 있고 또 그분을 위하여 이 피조물들을 다스릴 수 있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단지 부분적으로만, 즉 그것도 아주 적은 부분에서만 그렇게 할 수 있습니다. 왜냐하면 우리의 옛 본성이 우리가 죽는 그 날까지 완전하게 사멸되지 않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모든 생활에서 우리 안에 남아 있으면서 우리의 의지를 거스르는 옛 본성을 대항하여 싸워야 합니다. 우리는 이 사실에 대해서 주의 날 제33주일에 가서 더욱 구체적으로 다루게 될 것입니다.
* 하이델베르그교리문답 6-8문 인간의 전적 타락 설교
* 하이델베르그교리문답 6~8문 인간의 전적 타락 동영상